사사즈카가 히구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전적으로 우스이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녀석의 근처에도 다가가지마! 악영향이다!”
“…….”
어지간한 사사즈카라고 해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스이는 평생 자기 탓이라는 걸 모르겠지만.
“나 대신이야?”
그리고 어느 날 사사즈카가 무심하게 물었다.
히구치의 과거사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날이었다. 정말로 무심한 짓이었다. 우스이는 일단 주먹을 휘두른 다음에
“너도 포기 안했어.”
라고 말했다. 사사즈카는 그제야 자신이 맞아도 싼 소리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스이의 주먹은 기억과 달리 꽤 매웠다. 자신이 약해진 걸지도 모른다. 얼굴에 남은 부운 자국은 츠쿠시가 치료해주었다. 그래도 치료에 쓰인 약품이며, 가제들은 우스이가 낸 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과거의 사사즈카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오랜 친우의 얼굴에 남은 거창한 상처가 나아가는 동안 우스이는 그를 볼 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아프지 않은데. 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을 어렴풋이 하곤 그만두었다. 그것은 마치 금속 조각품을 보고 ‘어, 저건 청동이구나.’ 라고 말하는 정도의 두리 뭉실한 짐작이었다. 그 이상은 애써 생각해 봐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그래.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입에는 길이가 채 줄지 않은 담배 한 개피가 물려 있었다.
어쨌든 우스이는 자신이 정한 일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히구치와 사사즈카 사이의 공적인 접촉은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단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우스이라고 해도 사적인 접촉까지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히구치는 목줄 매달아 달아놓을 수 있는 개가 아니었으니까.
“어라.”
“음.”
“당신이 사사즈카 에이시?”
“그래.”
“우스이가 무능한 작자라며 상종도 하지 말라고 펄펄 뛰던데.”
“음. 듣는 게 좋을걸.”
“흐음..”
경시청의 같잖은 사원 복지시설중 하나인 자판기와, 플라스틱 의자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일이었다. 우스이가 하도 펄펄 뛰길래 순진한 어린애를 생각했는데 말투며 키며 우스이보다 한참은 삭아 보이는, 그런 주제에 어린애의 얼굴을 하고 있는 꼬마였다. 히구치가 팔랑거리며 제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블랙커피 한 모금을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사사즈카는 잠시 망설이다가 우스이에게 히구치가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어있음을 보고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알려줘서 고맙다-라고 어색한 인사치레까지 한 우스이는 그날을 기점으로 해 전법을 바꿨다.
“어라.”
“음….”
“하, 이번 파트너가 당신이야? 우스이씨 이상한 사람이네. 이랬다, 저랬다.”
“…….”
백업으로 무려 츠쿠시가 와 있었다. 그리 거창한 사건도 아닌 일에 아끼는 졸을 두 명이나 투입하다니 우스이 답지 않은 낭비다. 그만큼 절실하단 이야기겠지. 내가 그렇게 무섭나. 히구치 앞에서 크와앙 하고 대마왕 포즈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봐야 키 차이도 별로 안 나지만.
히구치가 들고 온 노트북에 전선을 연결하고 버튼 몇 개를 건드려 익숙하게 기계를 가동시키더니 순식간에 작업에 몰두했다. 뭘 물어도 코대답만 하고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정보가 부족한 참이니 히구치가 뭔가 빼내 올 때까진 할 일도 없다. 마른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어쩐지 빗소리 같다고 생각하며 멍하게 긴장을 풀고 있었다. 츠쿠시가 뭔가 요깃거리를 사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묵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충견의 눈빛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서, 사사즈카도 따라 나섰다.
“어이, 츠쿠시. 이번엔 보육 담당이냐?”
그리하여 구질구질한 경시청 복도에 나란히 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랬다. 사사즈카는 갑자기 유쾌해 져서, 오랜만에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농을 던졌다. 잠시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던 츠쿠시가 엷게 웃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나란히 걸었다. 그날 먹은 음식은 온통 애들 취향의 달달한 것들뿐이었다. 히구치는 생각보다 유능했으며 사건은 조기에 일단락 지어졌다. 사사즈카는 히구치와 몇 번 더 말을 섞었고 우스이는 일주일간 사사즈카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사사즈카는 사춘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육아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히구치와 우스이의 관계를 지켜보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그러니까 몇 시간 전까지 그랬다는 것이다.
“뭐지 이건.”
“일주일간 휴가다. 상부엔 내가 말해뒀으니 네놈의 종잇장 같이 얇은 커리어를 걱정할 필요 없어. 잘 돌봐!”
문이 열렸을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닫혔다. 쾅 소리가 났다.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잤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해 보았다. 우스이에게 열쇄를 넘겼었던가? 그랬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츠쿠시가 챙겨두었을지도 모른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 자려던 사사즈카의 발치에 따뜻한 것이 걸렸다. 히구치였다. 가느다란 손목에 붕대가 칭칭 감겨있고, 몸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사사즈카가 머리카락을 헤집어 젖은 이마를 짚었다. 자신 없이, 아마도 열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머릿속에 해열제, 라던가 얼음 배게 라던가 하는 덧없는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주머니 속에서 웅웅거리며 신호가 왔다. 츠쿠시였다.
“여.”
[아,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주일간 본청에 불려 가야해서..]
“폐라고 할 건 없지. 휴가도 주는 거니까. 먹이고, 재우고, 돌보면 되는건가. 자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 묶어두는 건 참아주세요.]
“음..”
[우스이씨는 히구치의 일을 알리길 원하시지 않는 것 같지만, 조만간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당황스러우실테고….]
“아, 우스이가 밝히고 싶지 않아한다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데.”
[…주제넘을 짓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선배는 타인에게 좀 다정하게 굴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사사즈카가 바닥에 츠쿠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기계를 내려놓았다.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 히구치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등과 허벅지에 팔을 끼워 들어 올리고 나서야, 머리카락이며 살은 푹 젖었는데, 옷은 생각보다 젖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옷을 입힌거다. 그리고 팔목에 상처자국.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일단 막연히 씻겨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옷을 벗겼다.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수갑으로 다친 쪽 팔을 잡아 올려 고정시키고 따뜻한 물에 히구치를 밀어 넣었다. 몸이 자꾸 미끄러졌다. 잠들었나 싶어서 봤는데 눈은 뜨고 있었다. 히구치의 몸이 주륵 미끄러질 때마다 팔목을 고정시킨 수갑이 당겨져서 찰캉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사사즈카가 결국 욕조 머리에 걸터앉아서 물속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어 주자 추욱 하고 늘어진 히구치의 상반신이 그대로 무게를 실어왔다.
흐늘흐늘거리는 히구치의 몸을 수건으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붕대를 갈아 주었다. 입고 온 옷은 축축해서 다시 입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옷을 입히자니 변변한 물건이 없다. 수건으로 둘둘 몸을 말아주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씌웠다. 천 더미에 머리만 불룩 나온 괴상한 꼴이 되었지만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잘래?”
찬장에서 해열제를 찾아보려다 포기한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앉은키와 비슷한 이불더미 앞에 앉으며 물었다.
“자라.”
사사즈카가 이불더미 째로 히구치를 들어올렸다. 침대에 눕히자 히구치가 침대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말았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서 날붙이와 권총을 집어든 사사즈카가 몸을 돌렸다. 히구치가 말했다.
“여기선 안 죽어.”
“…….”
“시체 치우는 거 고역이잖아. 냄새 오래 나고. 미안해.”
“…괜찮아.”
이미 시체 냄새로 가득하니까 한구 더 늘어도 별로 상관없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파에서 잠든 사사즈카가 눈을 뜬 것은 새벽 6시 경이었다. 부옇게 동이 터올 법도 한데 하늘은 그저 구질구질한 회색이었다. 그래도 제법 눈이 부셔서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가렸다. 그 전부터 깨어있긴 했다. 눈을 뜨는 대신 뒤척거리면서 시간을 죽였던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드물게 다시 잠들기도 했다. 그렇게 조각난 잠을 그러모아서 겨우 생존할 만큼의 휴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삐그덕하는 경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누구인지 알면서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히구치가 알몸으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허연 형체가 유령 같았다.
“목말라서 나왔어?”
“술 있지.”
“…냉장고에.”
히구치가 성큼성큼 부엌이라고 하기도 뭣한 곳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당겨 열자 문 안에서 새어나온 노르스름한 불빛에 마른 몸이 드러났다. 너 진짜 말랐다. 어느새 히구치의 등 뒤로 다가온 사사즈카가 자기 몫의 술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히구치가 고개를 들어 등에 선 사사즈카를 바라보았다. 아, 좀 실례이려나? 알몸인거. 히구치도 자기 몫의 술병을 집었다. 사사즈카가 턱짓으로 히구치의 옷을 널어둔 곳을 가리켰다. 히구치가 삐그덕거리며 거기로 걸어가 옷을 걸쳤다. 아직 축축해? 사사즈카가 물었다. 좀. 괜찮아. 라고 답이 되돌아왔다.
마주 앉았다. 사사즈카가 먼저 술병을 땄다. 지금 즈음 핸드폰에 도착했을 츠쿠시의 문자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히구치가 어색하게 사사즈카를 따라 술병을 땄다. 술을 삼킬 때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사사즈카가 한 모금 마시자 술병의 목 부분이 다 비었는데, 히구치는 그 반에 반도 안 마셨다. 쓰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다. 점점 히구치가 한번에 삼키는 양이 늘어났다. 사사즈카가 보조를 맞춰 술병을 비웠다.
“복수한다면서.”
히구치의 발음은 별로 정확하지 않았다. 웅얼거리는 소리를 대충 알아들은 사사즈카가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에 풀린 눈이 사사즈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사사즈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좋겠다. 난 못해.”
“.....”
“자살하는 거. 무서워서.”
히구치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묶인 붕대를 신경질적으로 긁어 내렸다.
그날 늦게까지 히구치는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울려서, 누가 침대를 건드리기만 해도 앓는 소릴 해댔다. 죽을 사다 먹였더니 온통 토악질을 해 놨다. 알코올은 가수분해 과정이니 물을 먹였다. 끙끙거리던 히구치는 잠들었다. 그 와중에 출근이 어쩌고 하는 기특한 소리도 했다. 전화해봤더니 히구치의 일은 이미 잘 처리되어있었다.
사사즈카는 어제 대충 바닥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시가키의 혼란스런 문자 사이에 부조리하게 츠쿠시의 문자가 끼어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장문의 글자를 보니 절로 읽을 생각이 달아났다.
“하아….”
결국 츠쿠시가 보낸 문자는 휴지통으로 옮겨졌다. 덤으로 이시가키가 보낸 문자도 지웠다.
잘 돌보라는 소리만 들었을 뿐 그 밖에 지시사항은 받지 않았다. 우스이 성격에 필요한 걸 말 안 했을 리도 없다. 한층 가벼워진 핸드폰을 다시 탁자위에 올려놓은 사사즈카가 다시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잘 만큼 잤는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히구치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사사즈카를 바라보았다. 히구치가 물었다.
“저기,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음. 기억 안나? 츠쿠시가 업어왔어. 아. 그리고 결근 건은 우스이가 잘 해결해놓은 것 같으니 걱정할 것 없다.”
“사사즈카씨는…. 출근 안 해?”
“일주일 휴가야. 너 돌보는 조건으로.”
“안 돌보고 있잖아.”
“…뭐 해야 하지.”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일단 커튼 좀 쳐줘. 눈 아파. 사사즈카가 창가로 걸어갔다. 햇살은 히구치의 눈을 통해, 시신경을 비집고 들어가 뇌 가장 깊은 곳의 어둑어둑한 곳까지 빛으로 더럽혀 버리려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곳의 혈관부터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조만간 뇌가 바삭한 과자 같은 것이 되어서 부서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 남자처럼.
커튼을 치고, 침대가로 다가오는 사사즈카를 보며, 히구치가 힘없이 키득거렸다.
우스이가 그렇게 난리를 치고 말리지 않았어도 결국 히구치는 아마 자기 스스로 사사즈카에게서 멀어졌을 것이다. 한끝만 잘못하면 저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서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한끝만 움직이면 되는 걸 그렇게 하지 못해서 가장 쉬운 복수조차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나가.”
말라붙은 사람. 아니 시체.
이미 자신도 반쯤은 저런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히구치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혼자 남아서 한참을 울고 난 히구치는 전심전력으로 후회했다. 머리가 3배쯤 더 아파졌던 것이다. 오후 4시. 사사즈카가 데워온 인스턴트 죽을 삼키자마자 다시 게워냈다. 사사즈카가 끌어안다시피 히구치를 화장실로 끌고 가 등을 문질러 주었다.
컥컥 거리자 노란 위액이 올라왔다. 사사즈카가 손으로 입가를 훔쳐 주었다. 하지마. 더럽잖아. 히구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유령 같다고 생각했다. 눈은 퉁퉁 부었고 뺨은 홀쭉하고 입가는 침투성이고 눈 밑은 시커멓다.
수도를 틀자 찬물이 콸콸 흘러나와 히구치의 손을 적셨다. 못하겠어. 히구치가 중얼거렸다.
사사즈카가 수도꼭지 방향을 돌려서 물의 온도를 조절하고 허리에 팔을 감아 히구치의 몸을 지탱했다. 토할 것 같아. 히구치가 다시 말했다. 참아봐. 식도 상한다. 사사즈카가 조용조용 타이르며 히구치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사사즈카가 한쪽 손을 오목하게 오므려 물을 퍼 올렸다. 미지근한 물로 입가를 닦아주자 히구치가 다시 흐느꼈다. 술 정말 마시지 못하게 할 걸 그랬다. 사사즈카가 뒤늦게 후회했다. 시체라고 해서 미안해…, 히구치가 못 알아들을 소리를 웅얼거렸다.
히구치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오후 7시가 넘어서였다. 비척비척 방에서 걸어 나온 히구치가 말했다.
“…뭐야. 왜 벗고 있어.”
사사즈카가 TV에서 시선을 돌려 히구치를 바라보았다. 바지만 걸친 상태로 몸을 일으키자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경찰답게 좋은 몸이긴 했지만 참혹할 정도로 상처투성이라 태연하게 드러내는 게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사사즈카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제?”
“그럭저럭. 왜 벗고 있어?”
“아, 옷 다 버려서. 지금 빨래하고 있어. 좀 보기 그런가.”
“…나 때문이니 내가 뭐라 할 게 아니네.”
어느새 히구치의 앞으로 다가온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땀에 젖고 물에 젖고 여튼 엉망일텐데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다. 물이라도 마실래? 냉장고쪽으로 사사즈카가 걸어가자 비척거리며 히구치가 따랐다. 바짝 마른 목구멍에 물기가 부어졌다.
냉장고에 붙은 자석 광고지를 들여다보며 적당한 음식을 시켰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소파에 tv를 마주보고 앉았다. 컴퓨터가 없어 정서가 불안해진 히구치가 다리를 떨었다. 사사즈카가 별 생각 없이 허벅지를 잡았다가, 겸연쩍어 하며 손을 땠다. TV를 켰다. 황금 시간대의 재미있는 tv프로들을 다 지나친 사사즈카가 멍하게 바둑 프로를 들여다보았다. 사사즈카를 한번, tv를 한번 바라본 히구치가 물었다. 바둑 좋아해? 어? 아니…. 둘 줄 몰라. 그럼 이거 왜 봐? 열심히 보길래 좋아하는 건 줄 알았네. 진짜 이상하다니까. 히구치가 제멋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패널들이 잔뜩 나와서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는 토크쇼, 음악 프로그램.
“흐음.”
히구치가 턱을 괸 채로 채널을 돌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심야시간도 아닌데 포르노가 나온다. 히구치가 곁눈질로 사사즈카의 눈치를 살폈다. 앙앙거리는 신음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사사즈카는 히구치가 들고 있던 리모콘을 건네받아 볼륨을 조정했다. 남자의 몸 위에 올라앉은 여자의 몸이 흔들렸다. 가슴이 덜렁덜렁 거리는 걸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잡았다.
“뭐야 사사즈카씨. 반응이 재미없어.”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히구치가 넌더리를 내며 등을 쭈욱 폈다. 사사즈카가 고개를 돌려 히구치를 바라보았다.
“으…. 심심해.”
작게 하품까지 해 가며 온갖 귀여운 시늉을 하더니.
“여자랑 잔적 있어?”
라고 물었다.
사사즈카가 답했다.
“뭐, 있지. 담배 피워도 괜찮아?”
“…이미 한손에는 라이터를 다른 손엔 담배를 쥐고 있잖아.”
“음….”
흐릿한 담배연기가 방안을 채웠다. 그러고 보면 집안 전체에서 담배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한마디 할까 하던 히구치가 자기 집 공기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화면안의 여자는 이제 거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여자애가 처음엔 너무 아파해서.”
“……?”
“그래도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좋긴 하더라.”
히구치가 쫓기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사즈카가 고개를 돌려 히구치를 바라보았다. 뺨이 붉어져 있었다. 후욱.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잠시 다음 말을 고민하던 사사즈카가.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으로 풀어주고 하면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텐데. 손가락 3개쯤 들어갔을 때 넣으면 별 문제 없지 않나.”
“어….음….”
“아. 너무 멀리 갔나.”
“뭐야, 다 말해놓고 갑자기.”
하악, 야메떼. 이에. 콧소리 섞인 신음소리가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흘끔흘끔 곁눈질로 사사즈카의 눈치를 보던 히구치가 말했다.
“사사즈카씨는 저런 거 봐도 별로 흥분 안 되나봐? 평소에 얼마나 대단한걸 보는 거야?”
“아. 여자 좀 무서워해서.”
히구치가 그대로 굳었다. 인터넷을 헤집고 다니며 쓸 때 없이 늘어난 헛 지식들이 촤르륵 머릿속을 스친다. 반사적으로 달싹이던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정작 말한 쪽은 너무 태연해서 무섭다. 아무렇지도 않게 의미심장한 말 해 버리지 마! 히구치가 홀로 비명을 내질렀다. 사사즈카가 후욱. 하고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음. 그리고 화장실은 아까 침대 방에 있는데.”
라고 말했다.
히구치가 질린 표정으로 옆자리의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사사즈카의 시선이 미묘한 곳을 향해있었다. 결국 털선 고양이마냥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히구치였다.
“녀석….”
히구치의 뒷모습을 쫓던 시선이 다시 화면으로 향한다. 앙앙거리던 여자가 절정을 맞이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흐릿해진다.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성기를 끄집어내 가슴께에 허연 것을 뿌렸다. 사사즈카가 피우던 담배를 문질러 껐다. 한참동안 조용하다가, 건너 방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났다.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린 사사즈카가 중얼거렸다. 너무 심했나.
화장실에서 적당히 생리현상을 처리한 히구치가 다시 사사즈카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움찔거리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앉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면에선 여자의 가슴 사이즈와 시츄에이션만 바뀐, 그러나 결국 근본적으론 다를 바가 없는 살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히구치가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웅크려 앉았다. 손이 젖어있는걸 보고 사사즈카가 물었다. 수건 없어? 어. 없던데. 빨래해야겠군. 이미 하고 있잖아. 아. 그랬나. 바보 같아. 여자가 또 하앙하앙 거렸다. 히구치가 바지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더니, 무릎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추워? 라고, 사사즈카가 물으려던 차였다.
“여자애들. 좀 무서운 건 맞는 것 같아.”
히구치가 말했다.
“왜. 강간이라도 당했어?”
“…뭔소리야. 그보다 내 사정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아. 츠쿠시가 문자로 보내줬는데 지웠어.”
“왜? 남의 문제 따위 별로 관심 없어서?”
“필요하다면 우스이가 말해줬을 거라고 생각해서.”
할 말이 없었다.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액을 보여주는 게 아무래도 야하다고 생각하는 탓인지 삽입한 상태로 사정하더라도 꼭 질에서 정액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면 가슴에 뿌리던가. 이번엔 안에다 했다. 여자의 배를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려서 흘러나오는걸 보여줬다. 창녀 년이 질질 싸는데. 남자들이 키득거리며 그런 말을 했다. 여자가 흐느꼈다. 히구치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말했다.
“사귀던 여자애가 임신을 했는데.”
쿵하는 소리가 났다.
“…왜, 왜, 왜 그래.”
소파 옆의 협탁에 적당히 쌓아뒀던 책 더미가 사사즈카의 팔꿈치에 밀려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히구치가 둥그래진 눈으로 사사즈카와 엉망이 된 바닥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사사즈카의 표정은,
“아니…, 좀 놀라서.”
란 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했다. 눈을 깜빡이던 히구치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사즈카씨도 놀라는 게 있어? …아니 있겠지…. 사람이니까. 음…. 그래서. 아. 이런 이야기 별로 듣고 싶지 않을 텐데.. 난 또 뭘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고…. “
머리카락을 벅벅 긁는다. 히구치의 닳아빠진 손톱 끝에 핏물이 거뭇하게 묻어난 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톱 사이에 말라붙은 피찌꺼기를 긁어내리던 히구치가 억울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사사즈카씨는 이상해.”
“뭐가.”
“우스이씨에게 추궁당할 때는 몇 대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절대 말 안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성격이 꼬였구나.”
“뭐 상관있나. 여튼. 그래서. 그 애에게 그 이야기 듣고, 기대했는데. 아기를 죽여버렸어.”
“.....”
“죽여버릴거야.”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잘 돌봐. 라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사사즈카가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은 히구치의 고개가 자신의 어깨 정도에 시선을 맞춘 채 함께 들려 올라가는 건 조금 웃겼다. 의자 한쪽에 적당히 걸어둔 양복 안주머니를 뒤져 수갑을 끄집어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영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인지, 그때까지도 히구치는 멍하게 사사즈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사즈카가 다가와 히구치의 팔목에 그것을 걸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쪽을 어디다 걸어야 하나 고민했다. 팔목이 가는 것은 둘째 치고 한쪽엔 아직 딱지도 지지 않았을 상처가 남아있으니 수갑을 채우기가 뭐했다. 결국 다른 쪽의 수갑은 사사즈카의 손목에 걸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소파에 앉았다. 낡은 소파가 사사즈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볍게 삐그덕 거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수갑 덕에 아까 전 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히구치가 뒤늦게 기함해서 항의의 말을 외쳤다.
“무, 무, 무슨 짓이야!”
“아니. 좀 예방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
그 작은 얼굴에, 그 정도의 악의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잔 살인자라고!”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 꼰대라면 몰라도! 당신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
비명처럼 외쳤다. 사실이다. 사사즈카는 어떠한 만류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사적인 복수 외에 그 여자아이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헉헉거리는 신음소리가 타이밍도 적절하게 TV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건 나에게 말하지 말고, 자살 시도 하면서 애꿎은 우스이의 관심 끌지도 말고, 조용히 나가서. 죽이면 되는 거였잖아. 그렇게 충고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미안.”
히구치와 사사즈카의 팔은 이미 수갑으로 연결된 채 단단히 묶여져 있는 채였다. 사사즈카는 우스이가 빌어먹도록 영리한 남자라는 걸 떠올렸다. 히구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사즈카는 귀를 닫은 채 천천히 호흡했다. 정규 교육을 받긴 받았으니 아마 히구치도 낙태 비디오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발악을 하면서 자궁 속을 헤엄치던 아기의 목이 개구리 목 자르듯 뎅겅 잘려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히구치는 아마도 그런 장면을 상상했을 지도 모른다. 모를 일이다.
묶이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리모콘을 집어 들어 tv를 껐다. 신음소리가 시끄러워서 한 행동이었지 대화를 하자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인지 히구치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놔! 집으로 돌아갈 거야!”
사사즈카가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리모콘으로 시선이 갔다. 다시 켤까? 일단 대답을 해야 했다.
“안 돼.”
“이거 당장 풀어!”
악에 받쳐 외친다. 수갑 안에서 히구치의 팔목이 찰캉찰캉 움직인다. 팔목이 얇아서, 팔을 흔들 때마다 수갑에 살이 쓸렸다. 팔목에 고리 모양의 긁힌 자국이 남을 때까지 방치하다가, 겨우 하지 마. 라고 말했다. 사사즈카가 묶이지 않은 쪽 팔로 히구치의 팔을 잡았다. 우스이의 사랑스런 ‘망아지’군은 그 정도로도 울음을 터트렸다.
잠든 히구치를 적당히 침대에 던져놓은 사사즈카가 자신의 손목을 죄고 있는 수갑을 풀었다. 반대쪽은 고민하다 침대 머리에 대충 고정시켜 두었다. 히구치가 다음날 몸을 일으키다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겨우 달라붙는 타인의 체온에서 자유로워졌다. 담배가 절실했다. 입에 물고, 연기를 뿜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해 졌던 타인의 모습이 곧 부옇게 뭉그러졌다. 평소 같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뇌 속 깊은 곳에서 뽑혀져 나온 기억 실이 엉망으로 몸을 휘감았다. 하릴없이 방을 빠져나온 사사즈카가 이제 침대보다 더 익숙해진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 사이 실은, 귓구멍을 파고들어와 뇌를 간지럽혔다. 두개골을 열고 머리를 긁적이고 싶었다. 흐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스이가 술에 절어 찾아와 있었다. 사사즈카의 현관문에 될 대로 주저앉은 채 울면서 몇 번이나 용서를 구했다. 온몸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이란 말을 몇 번이나 했다.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 때.
사사즈카가 처음으로 이 나락에 굴러 떨어 졌을 때,
우스이가 최선을 다해 건냈던 나름의 위로가 칼날이 되어서 둘 사이의 무언가를 끊어놨다는 걸 겨우 인정했다. 그래 내가 미친놈이었다. 그때 무서워서 네 곁에 얌전히 있는 것도 못했다. 그딴 헛소리 지껄였던 거, 용서해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전적으로 내 마음 편해지라고 약속하나 하마. 기억은 해줄 수 있겠냐? 우스이가 말 그대로 무서울 정도로 울고 있었기 때문에 사사즈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서 그런 뜻을 읽었는지 우스이가 힘없이 웃었다. 포기 안한다. 맹세하마.
…뭘.
네 전부.
“후우.”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내뿜자. 우스이도, 눈물도, 현관 풍경도 흐릿해진다.
젊은 나이에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앉은 우스이에게는 적이 많았다. 히구치의 경우에도, 다른 상사들이 이리떠넘기고 저리 떠넘긴 끝에 귀찮은 짐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츠쿠시의 예상대로 망아지 꼬마는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HAL'사건 때가 특히 아슬아슬했다. 공(公)과 실(失)이 하나씩. 그런 식으로 망나니 꼬마가 만든 구멍을 매우고 있다는 걸 알고 어렴풋이 눈치 챘다. 우스이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퍽 즐거운 얼굴을 하기도 했다. 계절감각 없이 두툼한 털코트를 3월 즈음까지 입고 다닌 다거나, 그 꼴의 히구치를 발견한 우스이가 당장 코트를 벗기고 수상한 취향의 티셔츠를 내민다거나, 싫어죽겠다는 시금치 반찬을 밥 수저위에 듬뿍 올려준다거나, 씹는 둥 마는 둥 시금치 덩이를 삼킨 상대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준다거나, 그런 모습들을 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듬뿍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잠시 동안 고민하던 사사즈카는, 히구치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십 여년 전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나 질투하나.’
사사즈카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분명 했었다. 사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츠쿠시에게 상담까지 했다. 츠쿠시는 드물게 할 말을 잃었다가, 우스이 선배에게 예쁨 받고 싶으세요? 라고 물었다.
그런 걸까? 사사즈카가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답대신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일을 잘해도 우스이에게 득이 되는 건 똑같잖아?”
그런데 왜 히구치의 경우는 사심 없이 칭찬하고, 내 경우는 사심 없이 짜증을 내는 거지? 뒷말을 생략했지만 얼추 알아들은 츠쿠시가 말했다.
“글쎄요…. 이론상으로는 다를 바가 없지만…. 아무래도 선배는 우스이 선배의 라이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라이벌이고 빚이고 상처죠.
뒷말을 생략한 덕에 상대는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가 않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 바보 같은 진급 승부라면 이미 내가 진거 아닌가…. 하여튼 간에 이상한 녀석.”
츠쿠시가 웃었다.
“그나저나 선배가 이런 말 한 거 알면 좋아하시겠네요.”
“아. 그런가. 절대로 말하지 마.”
츠쿠시가 다시 한 번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그 녀석에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어요. 누구? 히구치요. 사사즈카로서는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정말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우스이.”
그리하여 말했다.
“뭐야 이 자식아. 내 집무실에 담배 물고 들어오지 말랬지!”
“그만 버려.”
“……!”
“나도 버렸다.”
우스이가 그 말을 어찌 이해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는 일이다.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방법이라고는 겉으로 보여 지는 행동 나부랭이가 전부였고. 그것만큼 숨기기 쉬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신뢰가 남았다. 우스이는 사사즈카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사즈카에게 우스이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상부의 말 중 하나였으니까. 여차하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사사즈카였지만, 그가 상대하려는 적은 이미 개인 레벨에서 해결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있지도 않은 계약서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사즈카 에이시는 히구치를 감시해 우스이 나오히로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우스이 나오히로는 공적인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이의 체포에 전력을 다한다. 손해는 아닌 거래였다.
밤이 길었다. 다시 TV를 켰다. 네모난 틀 안에서 여자가 밭은 신음을 흘렸다. 남자의 굵직한 성기가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교접부를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수북한 음모와 벌어진 붉은 살과 쿨쩍거리는 소리와 야한 신음성을 전달했다. 사사즈카가 멍한 눈으로 화면 안을 응시했다. 포르노의 특징상 일단 본격적인 성교가 시작되면 교접부 외의 곳은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다. 흐아앙 앙 아앙 과장된 신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여자의 엉덩이에 고환이 부딪쳐 덜렁거렸다. 사사즈카는 어색하게 바지버클을 풀고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공기 중에 갑자기 속살이 노출되자 추웠다. 신음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길어진다. 하지만 축 늘어진 사사즈카의 것에 흥분의 기색은 없었다. 사사즈카가 자신의 것을 손으로 쥐었다. 처음 하는 것처럼 손놀림이 둔했다. 끝부분을 누른 채로 몇 번 손을 놀려보았지만 발기조차 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면속의 성기가 사정했다. 사사즈카가 화면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정액을 내보낸 성기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잡아주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아랫배를 찰싹찰싹 내리치자 우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몇 번 더 배를 내리치자, 여자의 성기에서 끈적하고 하얀 액이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사즈카는 반쯤 바지를 내린 채로, 차가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쥐고, 멍하게, 스스로 잘라내 버린 온기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몸을 일으키려던 히구치가 그대로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았다. 악! 사사즈카씨! 옅은 잠에 빠져있었던 사사즈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몇 번 더 비슷한 내용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사사즈카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히구치가 자고 있는 침대 방으로 들어섰다. 어지간히 격하게 몸을 일으켰는지 히구치의 손목에는 벌겋게 긁힌 자국이 남아있었다. 사사즈카가 침대 머리에서 수갑의 한쪽 끝을 풀어내 자신의 손목에 채웠다.
“뭐야 그걸 왜 다시 거기다 채워!”
“…굿모닝….”
“굿모닝은 얼어 죽을 굿모닝이야! 은근슬쩍 평범한 아침을 연출하려고 하지 말라고! 수갑이 걸려 있잖아!”
“음. 씻을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히구치를 질질 끌고 가서, 칫솔을 꺼내주고, 덜 마른 수건을 하나씩 목에 걸고, 번갈아가며 소변을 보고 나란히 서서 이빨을 닦았다. 결국 히구치가 넌더리를 내며 말했다. 사사즈카씨…. 어제 한말 다 취소야. 우스이씨보다 더 지독한 것 같아. 그 말투가 얼마나 풀이 죽어 있었던지 사사즈카는 피식하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히구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옷 갈아입는 건 솔직히 힘들었다. 그 외에는 그럭저럭 할만 했다. 배고파. 뭐 먹자. 히구치가 제 것인냥 사사즈카의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나 며칠간 히구치의 간병에 희생된 냉장고 속은 초토화 되어있었다. 소주병 사이를 주의 깊게 살피며 식량의 편린이라도 찾아보려던 히구치가 한숨을 내쉬며 뭐 시켜 먹을까? 이번엔 내가 살게. 라고 말했다.
오전에는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았다. 하나씩 전단지의 번호를 누르던 히구치가 중간에 핸드폰을 집어던져 가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럭저럭 불어터진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봐야 두 사람이 할 일이라곤 TV시청뿐이었다. 히구치가 맥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심심해 죽겠어. 어쨌든 휴간데 이게 뭐람. 아저씨 냄새가 온 몸에 베어버릴 것 같아.”
“다른 거 틀까?”
“TV 머리아파.”
TV를 껐지만.
“…….”
“…….”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사사즈카씨는 평소 휴일에 뭐해?”
놀랍게도 사교적인 멘트를 떠올린 히구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음? TV볼걸.”
“…우울하네.”
“너는 뭐하는데.”
“최근 몇 달은 여자 친구 만나느냐 정신없었지 뭐.”
“우스이는 알아?”
“…응. 아마도.”
우스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잔뜩 풀이 죽은 히구치가 웅얼거렸다. 그 사람 진짜 완전 스토커야. 히구치가 말했다. 한쪽 손으로 무의식중에 사사즈카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자 친구 있다는 말.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는데, 저번에 컴퓨터 봤더니 내 여친 미니홈피를 알고 있었다니까! 진짜 심하지 않아? 스토커보다 더 무서워.
손끝을 간지럽게 건드리고,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감촉에, 사사즈카는 도통 하는 이야기엔 집중이 되지 않았다. 히구치가 굳은살이 박혀 딱딱해진 부분을 손끝으로 눌렀다. 촉감이 신기한 모양인지 자꾸만 건드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손을 잡아 빼자 히구치가 어쩐지 상처 입은 표정으로 사사즈카를 바라보았다.
“만지는 거 싫어?”
“간지러워서.”
“하아~ 비싸네, 비싸. 어른들은 다 그러더라.”
히구치가 입술을 비죽이며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누가 그랬는데?”
사사즈카가 물었다. 히구치가 흥얼거리듯 답했다. 우스이씨, 츠쿠시씨, 사사즈카씨.
마지막말은 꽤나 흐릿했다.
“아빠.”
“나 집에서 노트북 가져오고 싶은데 괜찮으려나. 아. 놀려는 거 아냐. 이상한 짓도 안 해. 그냥. 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그러니까….”
“…….”
지금 자기가 무의식중에 컴퓨터로 이상한 짓 하고 있는 거 고백한건 알고 있는 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우스이는 컴퓨터를 금지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잘 돌봐’라니 우스이 답지 않게 퍽 느슨한 명령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란히 집을 나섰다. 수갑을 제발 풀어달라고, 쪽팔린다고 히구치가 애걸했다. 도망치면 총을 쏘겠다는 사사즈카의 협박아닌 협박이 통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시작된 어색한 분위기는. 낮이라 텅텅 빈 거리에서도 이어져, 두 사람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모르는 사람인척 쭈뻣거리며 걷고 있었다. 집까지 가는 길을 모르겠다길래 일단 경시청 까지 갔다가 다시 히구치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주변지리를 몰라서 데이트는 어찌 했다 싶었다. 할 말도 없어서 물어봤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라고 거만하게 말했다.
겨우 도착한 히구치의 집은 빌트인식의 원룸이었다. 친척 중 누군가가 후견인이 되어서 계약한 곳이라고 했다. 친척이 있었어? 라고 묻자, 히구치가 응. 놀랍게도.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조금 있으면 내가 넘겨받겠지만. 뭐 속 시원하지. 라고도 덧붙였다.
히구치가 주머니를 뒤져 카드키를 빼 들었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쇠붙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길 기다렸지만 히구치는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 사이 문이 다시 잠겼다. 사사즈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히구치를 들여다보았다.
“아.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냐.”
다시 카드 키를 가져다댔다. 문이 열렸다. 히구치는 여전히 문을 열지 못했다.
“…? 왜 그래?.”
“…문 열면 피 냄새 나겠지? 나 욕실에서. 팔 그었는데. 빠져나올 때 봤더니 욕조가 분홍색이었어.”
“…음. 우스이랑 츠쿠시가 치우지 않았을까.”
히구치가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잠시 그 하는 냥을 바라보던 사사즈카가 품을 뒤져 수갑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뭐 냄새는 잘 안 빠지니까. 내가 들고 나올게. 어디 있어?”
“… 그건 고맙지만 왜 은근슬쩍 수갑을 꺼내는 거야.”
“혼자 두고 들어가야 하니까.”
히구치가 내민 한쪽 손을 수갑으로 묶어 문고리에 고정시켰다. 사사즈카가 곧 익숙한 노트북을 끌어안고 나왔다. 어뎁터 줄과 인터넷 선과 마우스 패드와 마우스 줄이 너덜너덜 늘어져 있었다. 히구치는 몰래. 우스이씨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라고 생각해 봤다. 한쪽 손으로 대충 선을 그러모아 정리하며 사사즈카가 물었다.
“뭐 더 필요한 것 없어?”
“없어. 고마워.”
“창문 열어두고 나왔으니까 피 냄새는 좀 빠질 거다.”
“어…그럼 들어가서 내 통장이랑 든 가방 들고 나와 줘.”
“어차피 7층인데 도둑이 들어봤자….”
“도둑 들면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그야 그렇지….”
돌아가는 길에 예상대로 이상한 쪽으로 걸어가는 히구치를 붙잡고 반대 방향을 돌아섰다. 히구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집은 경시청을 꼭지점으로 해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곧바로 갔으면 30분쯤 걸렸을 거리를 경시청을 들렸다 갔으니 꽤 돌아간 샘이다.
“어쩐지 바보 같네.”
사사즈카의 설명을 들은 히구치가 켁.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가 조금 기울었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에서 열기가 훅훅 하고 올라왔다. 더웠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를 한 갑 샀다. 알록달록한 쇼핑백도 하나 샀다. 뭐하려고? 히구치가 물었다. 잠자코 노트북이며 전원코드, 마우스 등을 봉투에 담았다. 한쪽은 칼자국이 한쪽은 수갑에 긁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히구치의 가느다란 팔목이 안쓰러웠다. 사사즈카가 대신 쇼핑백을 들었다. 히구치가 어색하게 고마워. 하고 말했다.
걸어가다가 약국이 보여서 약이라도 바를래? 라고 물었다. 히구치가 자신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리 심한 상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슬슬 배가 고파왔다. 외식을 해도 좋겠지만 딱 봐도 외향적인 성격은 아닌 히구치는 벌써부터 털 뽑힌 고양이 마냥 헉헉거리고 있었다. 장이라도 봐 볼까.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래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며 히구치에게 의사를 묻자 녀석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요리할 줄 몰라. 나도 잘 못해. 아무래도 좋았다.
총 8층으로 이루어진 백화점식 마트 앞에 선 두 사람은 기가 질려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낮 시간대인데도 꽤나 북적거렸다. 되돌아서 나오고 싶은걸 둘 다 서로 눈치 보느냐고 그대로 들어갔다. 히구치가 카트 사용법을 모른다는 건 매우 명백해 보였고, 사사즈카도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동전을 밀어 넣어 카트 하나를 빼 내었다. 빼고 보니 카트가 지나치게 넓다. 사사즈카가 말했다.
“탈래?”
“…미쳤어?”
주변을 보니 대충 연령 3-6세 사이로 보이는 아이들이 카트에 탑승해 있었다. 정신연령으로 보면 별로 다를 바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말이었는데 의외로 정색을 했다. 일단 노트북 여기다 넣어봐. 히구치가 말했다. 카트가 드넓어 보이는 건 사사즈카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두말없이 그것을 내려놓았다.
층이 엄청나게 많았다. 식품매장을 찾지 못해서 카트를 끌고 의상 종류를 집중적으로 판매하는 곳까지 갔다 왔다.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부끄러웠다. 매점 직원 중 하나가 웃음을 참으며 식품 매장은 지하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곳은 층별로 각각 다른 물건을 판매한다는 걸 겨우 기억해냈다. 히구치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투덜거렸다.
“어른이면서 이런 것도 몰라?”
“…할 말이 없군.”
그래도 막상 들어선 매장 지하층엔 맛난 것이 많았다. 배고팠는지 시식코너마다 발걸음을 멈춘 히구치가 좋다고 그것들을 집어먹었다. 덕분에 카트는 순식간에 가득 찼다. 신이 나서 발걸음을 옮기던 히구치가 갑자기 멈춰서 신중하게 물었다.
“…잠깐. 사사즈카씨. 내가 요리 잘 모르긴 하지만 크림치즈와 시금치와 돼지고기 안심으로 뭘 만들 수 있어?”
“…어….”
그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히구치의 손이 별로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사사즈카의 팔을 붙잡았던 것은. 셔츠의 얇은 천감을 뚫고 따끈따끈한 손끝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그리하여 겨우 쇼핑을 끝냈을 즈음 드넓었던 카트 안은 이런저런 식료품들로 터질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 쪽으로 움직였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이번에는 누가 봐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평범해 졌다. 음식이 가득 들어있는 카트 정도로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팔을 잡고 멀뚱히 선 히구치를 먼저 카운터 너머로 밀어 보냈다. 저쪽에 가 있어. 어, 어? 히구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건너편에 가서 섰다. 팔을 만지작거리던 체온이 떨어져나갔다. 카트에 실려 있던 물건더미를 계산대 위로 척척 옮겨 놓았다.
“비닐봉투 드릴까요?”
“아뇨. 히구치. 너 가서 박스 하나 만들어 와라.”
“어, 어?”
“저쪽에 가면 박스 쌓인데 있어. 테이프로 바닥 매워서 가져와.”
어리버리하고 있는 걸 일단 밀어 보내 놓고 이 많은 걸 어떻게 들고 가야 하는지 고심했다. 여직원이 친절하게도 3만원 이상이면 배달이 된다고 알려 주었다. 카트에 담긴 물건 중 저녁 삼을 만한 인스턴트식품 들을 적당히 집어 들었다. 30원인가 더 내고 비닐 봉투를 받았다. 히구치가 엉성하게 포장한 상자를 들고 왔다. 얼마나 큰 걸 골랐는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상자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웃겼다. 다음 손님이 사사즈카와 히구치가 사온 물건더미들 때문에 계산을 못하고 있었다. 여직원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상자 안에 물건들을 채워 넣었다. 주소를 불러주고, 3시까지 배달 온다는 말을 들었다. 사사즈카가 비닐봉지에 따로 잡아 든 물건을 집어 들었다. 히구치가 눈치껏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들어줄까 하다가 말았다. 대신 팔을 내밀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히구치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어쩌라고.”
“.....”
사사즈카는 조금 민망해졌다.
팔을 바꿔가면서 이리저리 들다보니까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히구치의 팔목에서 핏물이 배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집에 도착해 붕대를 갈아 주었다. 히구치는 어색하게 앉아서, 한쪽 손은 사사즈카에게 건대고 다른 한쪽 손을 어디다 둘지 모른 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큼지막한 전골을 냄비의 물이 보글보글 끓였다. 사사즈카가 인스턴트식품을 단체로 투하했다. 단조로운 조리법이었다. 냄비의 사이즈 외엔 평소와 다를 바가 없기도 했다. 문득 이 냄비가 우스이의 것이라는 걸 떠올렸다. 제멋대로 전골을 먹자며 한보따리 싸 들고 찾아와서 남겨두고 간 것이었다. 자취 경험도 없는 주제에 우스이는 요리를 참 잘했다. 히구치가 그 잠깐을 못 참고 노트북을 켜는 걸 보고 한마디 해줄까 했지만 말았다.
젓가락으로 얼추 덥혀진 인스턴트식품들을 들어올렸다. 식탁위에 올려놓고 보니 좀 과한 듯도 했다. 사람은 둘인데 새우 볶음밥과 카레라이스와 불닭덮밥과 짜장밥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히구치.”
“어어”
소파 너머로 코대답이 돌아왔다.
“나 진짜 잠깐만.”
핑계도 한번 대 주었다. 사사즈카는 문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을 때의 그 빗소리 같은 소리.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를 생각했다. 먼저 먹는 대신 어색함을 누르며 굳이 한마디를 덧붙인 이유는 그런 까닭일지도 몰랐다.
“셋 셀때까지 안 오면 묶어서 끌고 온다.”
히구치는 사사즈카가 셋을 말할 때에서야 쏜살같이 달려와서 식탁에 앉았다.
히구치는 보기보다 잘 먹었다. 달달한 거 아니면 입에도 안 되는 버릇도 고친 모양인지 매워, 매워 해가면서 불닭볶음도 훅훅 잘 먹었다. 그러고 보니 히구치의 입맛이 강한 맛에만 길들여진 것도 인스턴트식품이 주식이었을 과거와 퍽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사즈카는 갑자기 죄책감이란 걸 느꼈다. 아마도 지금, 간만에 남의 돈으로 산 밥을 얻어먹는 히구치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각이었으리라. 사사즈카가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던 히구치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설거지 내가 할게!”
사사즈카와 히구치가 동시에 굳었다. 식탁 위에 있는 것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들뿐이었으니까. 얼굴이 벌겋게 익은 히구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사사즈카가 그릇은 말려서 찬장에. 라고 말했다. 히구치의 얼굴이 벌겋다 못해 검붉게 익어버렸다. 그래도 어쨌든 설거지는 했다.
그 동안 사사즈카는 소파로 돌아와 사심 없이 히구치의 노트북을 뒤졌다. ‘일’ 폴더에 ‘우스이씨’폴더가 있었다. 클릭해 봤더니 제목이 크와앙. 짜증나. 쩔어. 인 워드 파일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었다. 열어봤더니 처리해야할 공문들이었다. 그림파일도 몇 개 있었다. 시체사진이 몇 장. 웹사이트의 캡쳐가 몇 장. 제목은 변태사이트. 시체 1, 2, 3. 그 생동감 넘치는 제목들 사이에 막 디지털 카메라에서 끄집어 낸 듯한 무미건조한 제목이 섞여 있는 걸 발견했다. 사사즈카가 그 파일을 클릭했다. 우스이였다. 정확히는 우스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 다 드물게 활짝 웃고 있는데다 우스이의 손이 히구치의 머리카락을 귀엽다는 듯 헤집고 있었다. 화질도 좋지도 않은 그것을, 히구치는 차마 이름을 바꾸려는 생각도 못했다는 듯 폴더 한쪽 구석에 보관하고 있었다. 사사즈카가 창을 닫았다.
“뭐야. 사사즈카씨. 남의 노트북 막 보고?”
어느새 다가온 히구치가 사사즈카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어. 미안.”
“그러면서 끊임없이 다른 폴더를 열고 있잖아? 잠깐만 손 치워봐.”
사사즈카가 마우스를 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사사즈카의 옆구리 사이로 파고들어온 히구치의 손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건드렸다. 당연하다는 듯 사사즈카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었다. 마우스를 잡지도 않았는데 어지럽게 창이 열렸다 닫혔다.
“이제 봐도 된다.”
작업물을 정리한 히구치가 말했다. 어깨에 실리던 무게가 사라졌고 목덜미에 와 닿던 따끈한 숨결도 멀어졌지만, 멀어지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사사즈카가 다시 폴더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뭐하고 있던 거야?”
“프로그래밍. 우스이씨 명령. 내일이 마감이라서.”
“휴간데 성실하구나.”
“다른 놈이 만들면 우스이씨 성에 안 찰테니까..”
몇 걸음만 돌아오면 될 거, 꼬물꼬물 굳이 쇼파 뒤쪽에서 타고 올라온 히구치가 포옥. 사사즈카 옆자리로 떨어졌다.
“남이 엉망으로 만든 거 고치느니 내가 처음부터 만드는 게 낫지!”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인 말이었다. 저번에. 신원조회 프로그램 있잖아. 그거 다시 짠 것도 내가 한 거다? 바뀐 줄도 몰랐지만 사사즈카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히구치가 신이 나서 프로그래밍 용어를 섞어 설명했다. 전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사사즈카는 열심히 들었다. 머리카락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히구치가 웃었다. 우스이와 찍었던 사진속의 아이 같은 미소였다.
그 이후로 히구치는 주욱 일에 집중했다. 사사즈카는 히구치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은 채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륵 미끄러져 어깨에 기댔다. 히구치가 만들던 빗소리가 잠깐 멈췄다. 졸려? 히구치가 물었다. 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대있고 싶었다. 그래서 응. 하고 답했다. 히구치가 허리를 펴서 높이를 맞춰왔다. 그래봐야 낮았고, 어깨는 말라서 딱딱했지만, 사사즈카는 그저 그 가느다란 어깨에 기댄 채로,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노트북 화면을 멀거니 바라본 채로,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빗소리에 집중했다. 담배 냄새나. 히구치가 말했다. 투덜거리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다.
일어났을 때. 주변에 깜깜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사즈카는 당황했다. 정말로 잠들었던 것이다. 사사즈카까 히구치의 어깨에서 자신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말이 머리지 잠들었으면 정말로 체중이 실려서 꽤 무거웠을 거다. 꽤 강한 압력이 사라진 건데도 히구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사즈카가 흐릿한 시야를 억지로 비벼 선명하게 하자, 홀린 것처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히구치의 얼굴이 드러났다. 캄캄해진 방 안에서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흐릿한 불빛이 히구치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양 귀를 틀어막고 있는 이어폰을 끄집어내 자신의 귓속에 밀어 넣었다. 기계 잡음이 귀를 찔렀다. 모니터 속엔 목을 매단 시체. 시체가 되어가는 누군가의 몸이 경련하고 있었다. 기계 잡음 사이로 소름끼치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매단 줄에 긁혀 천장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륵그륵 하며 숨 너머가는 소리. 카득 카득 카득.
축 늘어진 인간의 몸에서 체액이며 배설물이 질질 흘렀다. 히구치가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검붉은 혀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완전히 멈췄다. 데롱데롱. 몸이 슬쩍슬쩍 흔들리는데도 오히려 죽었다는 게 너무 확실해 보였다. 체액을 질질 흘리는 몸과, 벌어진 입과, 핏발이 선 눈을 차례로 클로즈업한 화면이 그대로 멈췄다. 히구치는 눈을 깜빡이는 걸 잊은 것 같았다. 눈이 붉게 충혈 돼 있었다. 히구치가 마우스를 움직여 다른 폴더를 열었다. 사사즈카는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히구치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다 헐어서 깨물 것도 없는 못난 손톱을 자꾸 자꾸 깨물었다. 사사즈카는 수갑을 대신해 자신의 손으로 그 팔목을 붙잡아 당겼다. 화면 속에 녹색과 검은색으로만 표현된 흐릿한 화면이 드러났다. 개구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개구리가 아니었다. 가느다란 팔과 툭 튀어나온 배.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일그러져 있는 얼굴. 태아였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양수 속을 헤엄치던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았던 히구치의 눈이 더욱 붉어졌다. 그리고 여자의 질속으로 아이의 숨통을 끊어낼 도구가 들어왔다. 그 원시적인 도구가 양수 속을 헤집었다. 태아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휘젓는 꼴이 영락없이 개구리였다. 히구치의 입에서 무감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말라붙었다.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태아의 바르작거림은 목이 잘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목이 잘리는 순간 태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화면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화면이 멈췄다.
“아. 나 좀 씻고 와도 되나?”
히구치가 손가락을 움직여 동영상을 껐다. 사사즈카가 고개를 끄덕일 사이도 없이 돌아선 히구치가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컴퓨터를 보았다. 작업표시줄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동영상 두 개가 썰렁하게 들어찬 그 폴더의 이름은 Family 였다.
욕실에서 돌아온 히구치는 멀쩡한 꼴을 하고 있었다. 밥 먹자. 밥 먹자. 제법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사사즈카가 자는 사이 쇼핑한 물건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 엄청나게 낭비적이고 비계획적인 식재료들은 냉장고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건 히구치의 솜씨였다. 오이가 냉동실에 있는 거 빼고는 흠 잡을 것 없는 배치였다. 사사즈카가 잠들어 있는 사이, 히구치가 냉장고를 정리하기 위해 몇 번이나 컴퓨터와 냉장고 사이를 오갔는지. 인터넷에 몇 수 십개나 되는 검색어를 집어넣었는지. 아마도 히구치 외의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날 저녁은 사사즈카가 급한 대로 만든 찌개와 멸치볶음과 시금치나물과 찬 오이였다. 히구치는 얌전히 먹고, 설거지도 했다. 쇼파로 돌아와서, 사사즈카를 밀어내고 노트북 앞에 앉은 히구치가 스너프 필름과 낙태 비디오 사이에 끼인 여자애 사진을 지웠다. ‘생각난 김에’라고 했다. 사사즈카가 손톱만한 미리보기 기능으로 본 여자애는 평범함 인상에 교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사사즈카가 물었다.
“히구치.”
“응?”
“그 여자애 어떻게 죽이려고 했어?”
히구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사즈카는 문득. 그날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날 아침은 나란히 늦잠을 잤다. 아침은 재끼고 점심은 어제의 수확물중 하나인 시리얼로 대충 때웠다. 우유를 안 사온 덕분에 편의점까지 다녀와야 했다. 히구치가 팔목이 아프다고 투덜거렸다. 붕대위로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사사즈카가 갈아줄게. 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아픈 건데. 히구치가 웅얼거렸다. 사사즈카가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붕대를 풀 때는 거즈조각에 늘어붙은 피딱지가 함께 떨어져 나오는 바람에 무척 아파했다. 차마 상처자국을 보지도 못한 채 사사즈카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히구치가 투덜거렸다. 사사즈카는 묵묵히 붕대를 갈면서, 그제야 손목에 무리 가니까 컴퓨터 그만하라는 흐릿한 잔소리를 했다. 코로도 안 들었다. 본격적인 잔소리는 오후 4시경에 우스이에게서 왔다. 히구치가 지난번에 작업하던 파일을 완성해서 메일로라도 보낸 모양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짜랑짜랑 울리는 목소리가 사사즈카에게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히구치가 어, 어, 알았다니까! 하고 코대답을 했다. 일 하라고 할 때는 안하고 쉬라고 하면 또 청개구리처럼 하고 앉았지! 팔목도 안 멀쩡한 놈이! 덤으로 사사즈카도 혼났다. 다친 애가 컴퓨터 하는 거 그냥 보고 있으면 재밌냐? 재밌어!! 풀이 잔뜩 죽은 히구치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얼웅얼 거렸다. 컴퓨터는 이미 두 사람이 주로 생활하는 쇼파 존에서 쫓겨나 방구석으로 물러난 후였다. 사사즈카가 티비를 켰다. 이번엔 히구치가 사사즈카의 몸에 기댔다. 담배를 꺼내려던 손이 멈칫했다.
그리하여 “저녁 먹자.” 라고 히구치가 말했을 때의 시간은 이미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사즈카가 몸을 일으켜서 낮에 만든 국을 데우고, 밥통을 열어 밥을 펐다. 평소 때 하던 만큼만 했더니 밥이 조금 부족했다. 히구치의 밥그릇에 더 담았다. 그 사이 히구치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을 행주로 훔치지 않은 것이 꽤 걸렸지만 그냥 앉았다. 사사즈카가 밥을 담은 것은 히구치가 씻어서 찬장에 고집스럽게 밀어 넣어둔 플라스틱 용기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얄팍한 플라스틱 용기를 보고 히구치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냉장고 속에서 차갑게 식은 멸치볶음은 더 짰다. 먹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먹을 반찬도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사사즈카는 히구치에게 설거지를 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자기가 했다. 자기 전에 히구치는 또 그 영상을 보았다. 합쳐서 7분 남짓한 영상. 그것이 히구치가 가진 가족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옹송그린 등이 어이 없이 작았다.
“여자애 이야기 해줄래?”
사사즈카가 물었다. 잠시 동안 침묵하던 히구치의 말은 갑작스럽게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두서 없이 계속. 계속 이어졌다. 결국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말을 멈추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레크나가 누구야?”
“걔.”
“아. 일본인 치고 이름이 특이하네.”
“? 뭔소리래. 이름이 그걸 리가 없잖아. 게임 아이디야.”
온라인 게임 길드에서 만난 여자애라고 했다. 정모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봤고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헤어져서 집에 오는 길을 보니 같은 전철을 타고 있었다. 집이 가까웠다. 히구치가 웃었다. 그 뒤로 둘은 게임 상에서 퍽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몇안되는 길드의 여자 유저였기 때문에 이곳저곳 레크나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충분했다. 그래도 직접 얼굴까지 본, 전 서버 통틀어 10명도 안 되는 만렙 유저가 쏟는 관심은 각별했다. 레크나는 곧 길드 내에서 히구치의 비공식 애인캐가 되어있었다. 히구치는 충분히 즐겼다. 덕분에 직장에서 잠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레크나를 위해서 관심도 가진 적 없던 힐러 고렙 템들을 모았다. 필요한 것이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 효율적으로 투자하던 플레이 방식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은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히구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새벽. 혼자. 혹은 레크나와 함께 레이드를 뛰면서 이런게 사랑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비효율적인 짓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레크나와 레벨 차이가 꽤 나는지라 그녀의 레벨에 맞춰 사냥터를 전전하다보면 히구치는 경험치를 조금도 얻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레크나가 미안하다고 했다. 히구치는 정말로 괜찮았다. 밤엔 학원에서 막 도착한 레크나의 렙업을 돕고 새벽엔 그녀를 위해 고렙템을 모았다. 모아놓은 골드야 퍽 많았으니 거래로 구해도 되겠지만 굳이 직접 아이템 헌팅을 다니는 비효율적인 짓을 하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2주를 낭비하던 히구치는 결국 직장 내에서 우스이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핸드폰 비는 문자 때문에 더럽게 많이 나왔다. 보너스 달라고 우스이에게 투덜거리다가 정말로 얻어맞았다. 투덜투덜 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켰다. 마냥 좋았다.
그리고 히구치는. 어느 날 드디어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길드 사람들이 레크나의 캐릭터에 찍접거리는 것이 심히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고렙 힐러는 확실히 귀한 존재여서, 이곳저곳에서 레크나와 파티를 맻으려 하였다. 레크나는 언제나 히구치에게 허락을 구했다. 귀여웠다. 그리하여 고렙들의 전유물이라는 게임내 성을 마련하는데는 꼬박 일주일 걸렸다. 드는 공에 비해 별반 쓸모가 없어서 구할 생각도 하지 않던 성이었다. 부옇게 동이 터오는걸 바라보며, 겨우 마지막 퀘스트를 수행한 히구치는 성의 이름을 넣는 곳에 레크나. 라고 쳐 넣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다음날 히구치는 레크나에게 고백했다. 풀 옵션으로 호화롭게 꾸며진 성의 BGM은 히구치가 캐쉬템으로 구입한 로맨틱한 음악이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해 단 한번도 캐쉬템을 사용하지 않았던 히구치가 처음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깨는 것이었지만. 원래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히구치가 선물한 전 서버 5개뿐인 고렙 힐러 전용 서클렛 “천사의 숨결”과, 귀속템인 순백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레크나가 자신의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성으로 들어섰다. 성의 홀에, 전 서버 최고의 마검사 히구치가 서있었다. 히구치가 레크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말했다. 어제 준비한 고백의 말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떨렸지만, 게임속의 마검사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떨지 않았다. 레크나가 기꺼이 히구치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길드 전용 채팅창으로 결혼식 날짜를 알리며. 게임 내 선물 시스템을 통해 십만 골드가 넘는 성녀의 반지를 전달하며, 히구치는 퀭한 눈과 떡진 머리를 한 채로, 집구석의 의자위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토닥토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잊었다.
“다음 날 만났어.”
히구치가 말을 이었다. 사사즈카는 문득, 항상 입고 다니던 칙칙한 녹색 티 대신 히구치가 다른 옷을 입고 온 적이 있었나 떠올려 보았다. 물론 히구치의 옷차림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우스이는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눈치 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럭저럭 사귀고. 나 어차피 혼자 사니까. 가끔씩 학원가기 싫다고 와 있고 그랬어. 우리 집 키 줬으니까. 학교 끝나고 낮잠 자고 가기도 하고.”
밥도 해줬어. 히구치가 얼굴을 붉혔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데. 집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도둑인가?! 헐래벌떡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열쇠를 밀어 넣었다. 급한 손놀림에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아. 오빠 왔어요? 앞치마 차림의 여자애가, 문고리를 쥐고 황망히 선 히구치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교복 차림이었다. 한쪽 손엔 국자를 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눈앞이 순식간에 뿌옇게 흐려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가득 했다. 우스이에게 선물 받고 한 번도 제대로 쓴 적 없는 전기밥솥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고 있었다. 좀 늦었네? 맘대로 나 들어와 있어서. 미안. 오빠 저녁 차려주고 싶어서…. 혹시 화났어요? 히구치가 한쪽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화 안났어. 히구치가 말했다. 끌어안았다. 키스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파국을 맞이할 때까지. 두 사람의 연애사는 꽤나 알콩 달콩하게 이어졌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면 아마도 그것이었다.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엄마에게 잔뜩 혼이 난 레크나가 가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밤에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컵라면을 먹는 중이던 히구치가 깜짝 놀라서, 제대로 쓴 적도 없는 인터폰을 어색하게 집어 들었다. 레크나가 얼굴 가득 눈물을 담은 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히구치가 깜짝 놀라서 문을 열었다. 레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구치는 차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시간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미리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 있었다. 디지털 숫자가 어지럽게 바뀌었다. 히구치는 문득 자신의 몰골을 떠올리고 황급히 앞머리를 고정시키던 핀을 빼고, 엘리베이터 문에 얼굴을 들이댄 채 앞머리를 가다듬었다. 때마침 문이 열렸다. 눈물이 가득한 레크나가 와락 히구치의 품에 안겼다. …살기 싫어요. 레크나가 울먹였다. 처음 안아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로 열이 오른 몸은 더욱 따끈따끈했다. 히구치가 조심스럽게 등을 쓸었다. 오빠. 나 오늘 재워주면 안돼요? 품안에서 레크나가 속삭였다. 히구치가 대답대신 레크나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운이 안 좋았네. 한번해서 임신하기 쉽지 않은데.”
사사즈카가 담담하게 평했다. 히구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사즈카가 보기엔. 성적 떨어졌다고 고민하는 고등학생 나부랭이보다 삶 전체를 스스로 지탱해야하는 히구치 쪽이 훨씬 안쓰러웠다.
히구치가 여자애를 강간 한 것도 아니고. 사사즈카가 보기에 살인미수건만 처리되면 별반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우스이가 어디까지 이 일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뺨이라도 얻어맞았으면 히구치로서는 꽤나 억울했으리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저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엄연히 미성년자인 현역 고교생을 경시청에서 일하는 사람이 임신시켰다는 것. 거기다 살인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우스이는 당연하게도 이 일을 묻어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히구치가 이를 어떻게 여길지 궁금했다.
“총 빌려줄까?”
사사즈카가 말했다.
“……!”
히구치의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대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파리한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서, 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얀 치아였다. 저 입으로 여자애의 살결에 키스하고, 이빨 자국을 남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쓰러움 같은 가벼운 감정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히구치가 한참 만에 답했다.
긍정이었다.
히구치의 답변을 들은 사사즈카는 참으로 무심하게 텔레비전 아래 수납장을 열어 권총 한정을 꺼내 들었다.
“이런 거 집에 있어도 괜찮은거야?”
히구치가 물었다. 당연히 불법이었다. 퍽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문 사사즈카가 맛있게 한 모금 들이마시며 대답대신 물었다.
“총잡아본 적 있어?”
히구치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그냥 쏘면 되긴 하는데. 사사즈카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쏘면 되긴 하지만, 엄한 사람 맞추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칼이 나으려나. 사사즈카가 총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히구치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금속성의 물건에 와 닿았다. 사사즈카는 문득 자신의 손을 쓰다듬던 그 손가락이 얼마나 부드럽고 말캉거렸는지, 키보드를 두드릴 때의 그 섬세한 움직임이 얼마나 유연했는지. 그런 것들을 떠올렸다.
“총이 나아, 칼이 나아?”
“…….”
사사즈카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히구치가 움찔했다. 사사즈카는 별다른 감흥도 없는 표정으로 히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구치가 ‘시체같다.’라고 생각했던 그 눈빛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린 히구치가 몸을 떨었다. 비웃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진심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임신사실을 안 레크나는 일방적으로 히구치와 연락을 끊었다. 히구치는 한동안은 울면서 애원했고, 나중엔 레크나의 계정에 해킹해 들어가 그녀가 입고 있던 아이템들을 온통 바닥에 흩뿌리고 나왔다. 속옷차림이 되어있는 그녀의 캐릭터를 가지고 상대편 진영으로 갔다. 가자마자 죽었다. 그녀의 캐릭터 경험치가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귀속템들도 하나씩 떨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시체 상태가 되어서 바닥에 누웠지만. 그래봐야 현실의 ‘레크나’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히구치는 무기력했다. 어디서 알았는지 찾아온 우스이씨에게 다짜고짜 전화로 한소리 듣고 홧김에 욕실에서 팔을 그었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찾아온 우스이씨는 엎어놓고 엉덩이라도 때릴 기세였지만 팔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히구치의 모습을 보더니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히구치가 고개를 저어 우스이씨의 영상을 지웠다. 아마 자신이 레크나를 죽인다면 우스이씨는 꽤나 곤란해 질 거다. 그래봐야 내 말은 듣지도 않았잖아. 히구치가 입술을 비죽였다. 잘한다! 경찰이란 새끼가 여고생 임신시키고 책임 못질 것 같으니까 자살해? 우스이씨의 짜랑짜랑한 소리가 지금도 귓속을 파고들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서럽고 속상하고…. 화가 났다. 책임이라면. 오히려 지고 싶은 쪽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랬으니 우스이씨는 나에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혼자서 마음을 정리한 히구치가 말했다.
“총이 좋아.”
“그래.”
사사즈카가 몸을 일으켰다.
“… 지금 죽이러 가라고?”
물론 그건 아니었다.
사사즈카는 신경 써서 히구치를 싸맸다. 마스크도 씌우고, 모자도 씌우고 평소 입는 옷 대신 집에 있는 자신의 정장을 입혔다. 너덜너덜한 꼴이 과히 좋지는 않았지만 모습을 보여서 좋을 곳에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갈까.”
“어디 가는데? 수갑은 이제 안 해? 아니 그보다 갑자기 웬 동조?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없더니?”
“뭐….”
“…그 많은 질문을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기?”
사사즈카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히구치도 진심으로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사사즈카는 택시를 잡았다. 시커먼 남자 둘을 보고 수다스런 택시기사도 할 말을 잃었다.
“저기 사사즈카씨. 어디로 가는 거야?”
“사격 연습할 곳.”
“…….”
“한사람 죽이면 평균 8년 안에 가석방으로 풀려나오더라. 넌 불행한 과거도 있고 하니…. 한명만 죽이려고 노력해봐. 그 이상 죽이면 나도 가만 안둘 생각이고. 뭐 어차피 근거리에서 쏠 테니 익숙해지면 상관없겠지.”
“…….”
택시에서 내려서 걸었다. 히구치는 이제 사사즈카의 옆이 아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돌아갈까? 사사즈카가 한번 물었다. 히구치가 잡아먹을 듯 사사즈카를 노려보았다. 싫어. 사사즈카가 엷게 웃으며 히구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무겁다고 생각했다. 이제 익숙해진 담배냄새도. 지금은 잡아먹을 것처럼 몸을 덥쳐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귀를 때려부술 듯 흘러나오던 음악소리가 멈췄다. 어둠속에서 번들거리는 눈알 몇 개가 입구 쪽을 향했다. 어둠에 반쯤 먹혀 있는 지하 공간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기 까지 했다. 시야는 좁디좁았다. 그래도 그들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고, 그 중에는 이 공간의 관리인 격인 남자도 있었다.
“여. 이게 누구신가? 온다는 연락은 못 받은 것 같은데?”
“연습실. 잠깐 쓸 수 있어?”
“이거, 이거. 우리 형사님이 쓸 만한 연습실이 있을까 모르겠네.”
“음? 내가 쓴다는 말은 안한 것 같은데.”
“호?”
사사즈카의 뒤에 존재감 없이 숨어있던 히구치의 모습을 그제야 발견한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어디서 귀여운 꼬마를 데려 오셨어? 또 누구 인생을 말아 드시….”
“나라면.”
“…….”
“저 애 얼굴을 안 볼 거다. 기억도 안 할 거다.”
사사즈카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권총 한 정뿐었고, 그, 남자의 몸집은 사사즈카보다 훨씬 컸다. 그럼에도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영원히 다른 걸 못보고, 다른 걸 기억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거든.”
“하. 하하. 하하하하하. 이거, 이거. 꽤나 예민하신데?”
“나로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거든. 자. 가서 해보고 와. 몇 번 쏠 수 있게 해줘. 별로 실력 필요한 거 아니니까.”
남자 뒤편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말한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어깨를 툭. 하고 밀었다. 평소 같으면 꼬마라는 말에 발끈했을 히구치도 이번에는 군말이 없었다. 히구치를 훈련실로 들여보낸 사사즈카가 나른히 홀 안을 걸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뒤섞여 타앙, 타앙하는 총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가죽부분이 나달거리다 못해 죄 뜯겨져나가 시커멓게 변색된 솜조각이 드러나 있는 소파에 사사즈카가 길게 몸을 눕혔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누군가가 사사즈카의 머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매끈하지도 않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두피 깊숙이까지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사사즈카가 귀찮다는 듯 몸을 뒤챘지만 그 손가락은 참을성 있고도 집요하게 머리카락을 헤집을 뿐이었다.
“왜….”
사사즈카가 한숨이라도 내쉬듯 말했다. 쾅쾅거리는 음악소리에 뒤섞여 들리지도 않을 말이었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히구치가 몸을 떨었다. 작은 총인데도 반동은 상당해서, 평생 고운일 말고는 해본적도 없는 손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살점이며 핏물이 묻어났지만 시커먼 총신엔 표도 나지 않았다. 사람 모양의 표적을 몇 번 쐈다. 잘 맞지 않았다. 사사즈카가 딸려 보낸 사람은 처음 총을 잡을 때만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을 뿐 히구치에게 다가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기억하지 말라는 사사즈카의 협박에 가까운 말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예측만 해볼 뿐이었다. 그래도 쏜 총알 5개가 몽땅 표적을 빗나가자 자신을 방치하는 남자가 슬슬 짜증스럽기 시작했다.
“오케이.”
팔짱 낀 채로 귀를 막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히구치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나가.”
남자가 말했다. 히구치는 발끈했다.
“뭐가 나가야! 하나도 못 맞췄는데!”
“…뭔 헛소리야. 맞출 필요 없고 그냥 당기는 법만 알려주랬는데. 아- 됐고. 나 너 목소리 기억하기도 부담스럽고 여러모로 짜증스러우니 그냥 가라. 엉? 어린 게 어서 저딴 인간에게 걸려서…. 아니, 아니,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그냥 가라. 제발 가라. 가라고!”
“……!”
등을 떠미는 손길에 떠밀려 히구치는 사격장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쾅쾅거리는 음악 때문에 귀가 멍멍해졌다. 생각해보면 가까이에서 쏠 거니 총 당기는 방법만 알면 그 이상은 필요 없기도 했다. 손바닥이 화끈거렸고, 체온이 올랐고, 심장이 뛰었다. 복수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처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거다.
아까 전엔 깜깜하고 무서워서 들여다볼 궁리도 못하던 주변이 슬슬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눈에 익어서 만은 아니었다. 진짜로 총을 잡았고, 쐈다. 우스이씨도 해 봤을까? 가슴이 뛰었다. 판타지 세계관의 게임. 그러니까 히구치가 주로 하던 롤플레잉 게임에서 총을 무기로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총은 현실이었다. 히구치는 당당하게 컴컴한 홀을 가로질렀다. 사사즈카의 손에 남아있던 굳은살의 감촉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런 게 생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사사즈카씨 어디 있지.”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사사즈카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야 많았지만 잡고 묻자니 꼴이 우스워 어슬렁어슬렁 처음 카운터 까지 오고 말았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가 히구치를 발견하더니 손가락을 까닥여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히구치가 그쪽을 보았다. 컴컴했고. 허연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가섰다.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 끝났나?”
“…….”
사사즈카가 별다른 반응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히구치의 시야에 알몸이 별다른 가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셔츠며 바지가 더러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사사즈카가 주섬주섬 바지를 꿰고, 셔츠를 입었다. 단추를 잠그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못 박힌 것처럼 굳어있는 히구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어두컴컴하고 좁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히구치의 손에서 나온 핏물이 사사즈카의 손에 묻어났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빠져나올 즈음엔 넋을 잃고 있던 히구치도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손을 잡아 쥐고 있는 사사즈카의 손을 신경실적으로 떼어 놓았다.
“…뭐야?”
“뭐가.”
“당신…,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몸과. 그 몸을 어루만지는 손과. 벌어진 다리사이로 발기한 타인의 성기가 감출생각도 없이 생생히 드러났다. 지금도 드러난 사사즈카의 목덜미에 잇자국이 남아있었다. 멍한 눈으로 히구치를 바라보던 사사즈카가 답했다.
“섹스.”
돌아섰다. 걸었다. 멍하게 사사즈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히구치는 결국 사사즈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택시비가 없었고. 돌아가는 길도 몰랐다.
사사즈카의 집은 컴컴했다. 방금 전의 지하실보다 훨씬 캄캄한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이야. 히구치가 뒤돌아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웅얼거렸다. 사사즈카가 달칵하고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히구치가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사사즈카도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겨우 불빛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살풍경한 방안을 척척 가로질러 싱크대로 걸어간 사사즈카가 손에 묻어난 핏자국을 씻어냈다. 쏴아. 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너무 컸다. 히구치의 시선이 사사즈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고. 그 목덜미에 잇자국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히구치가 고개를 돌렸다. 까진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얼굴은 화끈거렸다.
“손.”
“어?”
“안 씻어? 치료해야할 것 같은데.”
“아….”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할 수 있을까? 히구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다가온 사사즈카가 히구치의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피할 사이도 없이 손을 잡혔다. 붉은 혀가 낼름거리며 상처를 핥았다. 손가락이 움찔했다. 사사즈카가 의외로 힘을 주어 꿈틀거리는 히구치의 손을 잡았다. 히구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사사즈카의 손을 쳐냈다. 두 걸음 물러섰다. 사사즈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히구치를 바라보았다.
“미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